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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의 피의 전투 너머에 감춰진 이야기

현재가 중요해 2025. 6. 2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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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로마 제국의 역사와 문화, 사회상을 응축한 거대한 기념비

콜로세움은 단순한 투기장을 넘어 로마 제국의 역사, 문화, 사회상을 응축한 거대한 기념비이다.

 

■ 피의 전투 너머에 감춰진 콜로세움의 이야기를 파헤쳐 보면

 

1. 탄생: 로마의 위대한 선전 도구

 

※ 배경과 건설: 콜로세움의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Amphitheatrum Flavium)'이다. 서기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인 서기 80년에 완공되었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네로 황제의 호화로운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는데, 이는 폭군 네로의 사유지를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정치적 선언이자, 유대 전쟁(서기 70년 예루살렘 함락)에서 얻은 전리품과 노예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로마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동상인 '콜로서스(Colossus)'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건축학적 경이: 콜로세움은 당시 로마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타원형 구조, 아치와 볼트 기술을 이용한 견고한 설계, 5만 명에서 8만 명에 달하는 관중을 15분 만에 입장시키고 퇴장시킬 수 있었던 체계적인 입구(vomitoria)와 좌석 시스템은 현대 경기장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좌석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철저히 구분되어 로마 사회의 계층 구조를 반영했다.

 

2. 피의 스펙터클: 단순한 오락 그 이상

 

  검투사 경기: 콜로세움의 가장 잘 알려진 용도는 검투사 경기였다. 목숨을 건 잔혹한 대결은 로마 시민들에게 최고의 오락이었으며, 황제와 정치인들은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 정책을 통해 대중의 불만을 잠재우고 지지를 얻는 데 활용했다.

 

모든 경기가 죽음으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검투사들은 노예, 전쟁 포로, 범죄자 등 사회 최하층 계급이 많았고, 비록 일부는 스타 대접을 받기도 했으나 온전한 시민권을 누릴 수는 없었다.

 

  다양한 쇼: 검투사 경기 외에도 콜로세움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잔혹한 쇼가 펼쳐졌다.

 

  야수 사냥 (Venatio): 사자, 호랑이, 곰 등 이국적인 맹수들을 풀어 사냥하거나 맹수와 인간이 싸우는 잔인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모의 해전 (Naumachia): 경기장에 물을 채워 배를 띄우고 실제 해전을 재현하는 놀라운 스케일의 쇼도 벌어졌다. 이는 콜로세움의 뛰어난 배수 시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공개 처형: 잔인한 방식으로 범죄자나 전쟁 포로를 처형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때로는 신화 속 이야기나 역사적 사건을 재연하는 방식으로 처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체육 경기: 검투 경기 외에도 육상 경기와 같은 스포츠 경기도 열렸다.

 

3. 숨겨진 이야기: 기독교 박해의 상징?

 

콜로세움은 흔히 기독교 박해의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기독교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맹수의 먹이가 되거나 잔인하게 처형당했다고 전해지지만, 사실 콜로세움이 기독교인 박해의 주요 장소였다는 명확한 역사적 증거는 부족하다.

 

기독교 박해는 주로 네로 황제 시기에 시작되었는데, 당시 콜로세움은 아직 건설되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 박해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일어났으며, 콜로세움 외에 다른 원형경기장이나 경기장에서도 처형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18세기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기독교 박해의 성지로 지정하고 훼손을 금지하면서 이러한 인식이 강해졌다. 콜로세움에 십자가가 세워진 것도 이 시기 이후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로세움이 로마 제국의 권력과 잔인함을 상징하는 장소였음은 분명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희생이 있었던 곳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콜로세움, 피의 전투 그 너머에 감춰진 이야기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고대 유적인 로마의 콜로세움은 그 웅장함으로 숨을 멎게 할 만큼 인상적이다. 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검투사 결투의 무대였다는 것 외에, 이 거대한 경기장에 대해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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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몰락과 부활: 시대의 증인

 

  쇠퇴: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검투사 경기는 점차 인기를 잃고 5세기경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훼손되었고, 중세 시대에는 석재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건물 외벽의 대리석과 철제 고정 부품들은 다른 건축물이나 교회 건설에 사용되면서 현재의 모습처럼 파괴되었다.

 

  재활용과 보존: 한때는 주거지, 작업장, 요새, 종교 시설 등으로 용도가 변경되기도 했다. 18세기에 이르러 교황의 보호를 받게 되면서 보존 노력이 시작되었고, 20세기 들어 본격적인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현재: 오늘날 콜로세움은 로마의 상징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연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고대 로마의 가장 인상적인 유적 중 하나이다. 최근에는 콜로세움 중앙 바닥 부분을 복원하려는 계획이 추진되어, 과거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콜로세움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 인간의 욕망과 잔혹성, 그리고 역사 속에서 변화하고 재해석되는 문화유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살아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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