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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의 전설적인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그녀의 삶과 일. 2

현재가 중요해 2022. 11. 25.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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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의 전설적인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그녀의 삶과 일. 2

고인이 된 스웨덴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은 영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스크린 인물 중 한 명이다. 1915년에 태어난 그녀는 '카사블랑카' (1942년), '가스라이트' (1944년), '아나스타시아' (1956년)를 포함한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들에 출연했다. 그 과정에서 놀랍게 세 개의 아카데미 상, 두 개의 에미 상, 한 개의 토니 상, 네 개의 골든 글로브 상 그리고 BAFTA 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영화, 텔레비전, 무대에 출연하는 사이에 잉그리드는 그녀의 경력을 거의 단절시킬 뻔한 선정적인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1982년 67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마에 결국 자신의 목숨을 빼앗겼지만, 오늘날, 그녀의 이름은 할리우드의 황금기로 또 로맨스, 범죄, 코미디와 같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영화 모음집으로 불리며 우리곁에 남아 있다. 출처: (전기) (가디언) (워싱턴 포스트)

 

'스트롬볼리'... 그리고 스캔들! : 1950년 잉그리드는 이탈리아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1950)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그것은 운명적인 결정이었다. 촬영 중 두 사람은 로맨틱한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둘러싼 추문은 후에 페터 린드스트룀과 이혼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로셀리니 또한 그 사건 당시 유부남이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결혼 : 잉그리드는 로셀리니(사진)와 아들 레나토를 낳고, 그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그 후로도 쌍둥이 딸,  이소타와 이사벨라를 낳았고, 이사벨라 또한 유명한 여배우가 되었다. 이 스캔들은 할리우드를 뒤흔들었고 그 파장은 해외에서, 특히 스웨덴에서 가장 컸는데, 스웨덴의 보수 언론들은 그녀를 악마화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결혼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결혼

 

로셀리니의 아이들 : 잉그리드와 로셀리니를 향한 비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이탈리아 신현실주의 영화로 환영받는 '유로파 '51'을 함께 만들었다. 하지만 이 둘은 결국 1957년 이혼한다. 사진은 잉그리드와 레나토, 이소타와 이사벨라의 모습이다. 로셀리니와의 이혼으로, 린드스트룀과의 딸 피아와의 늦은 재회가 이루어졌다.

로셀리니의 아이들
로셀리니의 아이들

 

'아나스타샤' (1956) : 1950년대 초까지 잉그리드 버그먼은 로셀리니, 장 르누아르와 함께 계속 유럽에서 일했는데, 영어 외에도 그녀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그녀는 '아나스타샤'로 미국 영화계에 성공적으로 복귀한다. 상대역인 율 브리너와 안나 코레프/아나스타시야 역으로 호흡을 맞춘 잉그리드는 이 작품으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세 번째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했다.

'아나스타샤' (1956)
'아나스타샤' (1956)

 

'제 6의 행복의 여관' (1958) : 잉그리드 버그만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스타 중 한명으로 부흥기를 누리고 있었다. 1958년 영화 《인디스크리이트》에서 친구 캐리 그랜트와 함께 주연을 맡았고, 이후 영화 《제6의 행복의 여관》에 출연했다.

 

라스 슈미트와의 결혼 : 잉그리드는 12월 21일, 세 번째 남편인 스웨덴의 연극 사업가 라스 슈미트와의 결혼으로 1958년을 마무리했다. 이 커플은 1960년대 동안 파리 근교의 쵸이젤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7년의 결혼 생활 : 그들의 결혼 생활은 길고 대부분 행복을 유지했지만, 일에 대한 헌신은 종종 사랑의 힘을 시험하기도 했다. 여기서 피아 린드스트룀과 함께 사진에 찍힌 잉그리드와 슈미트는 결국 1975년에 헤어진다.

17년의 결혼 생활
17년의 결혼 생활

 

'더 턴 오브 더 스크루' (1960) : 1960년대 내내, 잉그리드 버그먼은 영화, 텔레비전, 무대 작업으로 커리어를 이어갔다. 그녀는 1960년에 존 프랑켄하이머가 감독하고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텔레비전 영화 '더 턴 오 브더 스크루'에 출연했다. 이 연기로 그녀는 텔레비전 영화/시리즈물의 주연 여배우 분야에서 첫 에미상을 수상했다.

'더 턴 오브 더 스크루' (1960)
'더 턴 오브 더 스크루' (1960)
 

'헤다 가블러' (1962) : 런던에서 버그먼은 영국 배우 트레버 하워드,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랄프 리처드슨과 함께, 헨리크 입센의 '헤다 가블러'를 1962년 텔레비전으로 각색한 작품을 작업했다. 3년 후, 그녀는 다시 레드그레이브와 함께 웨스트엔드의 '어 먼스 인 더 컨트리' 무대에 출연했다.

 

'선인장 꽃' (1969) : 1960년대가 끝나갈 무렵, 버그먼은 월터 매타우, 골디 혼과 함께 희귀한 코미디의 모험적 무대였던 '선인장 꽃'에 출연했고, 이 영화로 골디 혼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다음 무대 : 더 많은 무대 작업으로 1970년대까지 영국은 잉그리드를 붙잡아 두었다. (1974년 런던에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또 뉴욕, 로스앤젤레스, 워싱턴 D.C.의 극장에서 일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1974) : 그녀는 1974년 아거사 크리스티의 1934년 소설을 바탕으로 한 시드니 루멧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으로 영화계로 복귀했다. 상업적이고 비평적인 성공을 거둔 버그먼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세 번째 오스카상)과 처음이자 유일한 BAFTA를 수상했다. 그리고 그녀가 인생에서 "3막"의 정점에 있을때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1974)
'오리엔트 특급 살인' (1974)

 

암진단 : 1974년 6월 잉그리드 버그먼은 암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이 병이 그녀의 일에 장애가 되도록 허락하지 않았고,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영화, 티브이 그리고 무대에 등장했다.

 

'가을 연가' (1978) : 1978년 '가을 연가'는 오스카 후보에 오른 그녀의 첫 모국어 작품이었다. 그녀는 다른 스웨덴 여배우 리브 울만과 함께 출연했는데 이 영화가 잉그리드의 마지막 영화 출연이었다. 재능있는 스웨덴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르그만과 함께 일하고 싶어했던 소망을 이룬 작품이기도 하다.

 

'골디라고 불리는 여자' (1982) : 1980년 잉그리드의 자서전 '잉그리드 버그먼: 나의 이야기'가 출판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꽤 힘들었던 잉그리드 버그먼은 은퇴 후 사람들의 설득으로, 텔레비전 전기 영화 '골다라고 불리는 여자' (사진)에서 전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르를 연기했다. 이 영화는 1982년 4월 26일에 초연되었다. 잉그리드는 두 번째로 에미상 후보에 그리고 네 번째 골든 글로브 후보에 올랐고, 두 상 모두 사후에 수여되었다.

 

잉그리드 버그만, 세상을 뜨다 : 1982년 8월 29일, 67세의 나이로 잉그리드 버그만은 세상을 떠났다. 스톡홀름의 노라베 그라빙 플라센에 있는 단순한 묘비가 그녀의 안식처라고 말해준다.

잉그리드 버그만, 세상을 뜨다
잉그리드 버그만, 세상을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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