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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금성산성(潭陽金城山城)은 호남의 3대 산성 가운데 하나...

현재가 중요해 2023. 1. 1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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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금성산성(潭陽金城山城)은  호남의 3대 산성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양군 금성면과 전라북도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금성산에 위치한 금성산성은 호남의 3대 산성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산성은 철마봉, 운대봉, 장대봉을 연결하여 이중 산성을 이루고 있으며, 외성은 6.486m, 내성은 859m에 달하는 석성입니다. 금성산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성의 주위 여건 및 고적의 증거로 보아 삼한시대로 추정됩니다.

 

산성산으로도 불리는 금성산 줄기의 해발 350∼600m 능선에 쌓은 산성이다. 길이가 3km에 가까운 큰 규모로, 전라남도 장성의 입암산성, 전라북도 무주의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 3처산성(三處山城)으로 불렸다. 1380년 우왕 9월 왜구가 남원성을 공격하고 운봉현을 약탈한 뒤, “광주의 금성(金城)에서 전마(戰馬)를 배불리고서 북상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금성’은 금성산성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1,804척이며, 성 안에 9곳의 샘과 제사처인 신사(神祠)가 있다고 하였다. 처음 축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혹은 신라말 고려초라고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산성의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안으로 들어와 보호를 받는 입보용(入保用) 산성으로 사용되었을 듯하다. 1237년 고종에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이라고 하면서 봉기한 이연년(李延年)이 담양군과 원율현(原栗縣)을 거점으로 세력화하고서, 산 속에서 무리를 불러모아 촌락을 노략질하였다. 

 

이보다 이전인 1256년(고종 43)에는 몽골의 차라대 군대가 담양에 주둔하였는데, 이 때 금성산성은 담양, 광주 등 주변 지역민의 입보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외성과 내성의 2중성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의 둘레는 2㎞, 내성의 둘레는 700m이다. 성곽의 높이는 3m 이내이며, 성벽에 사용된 돌은 화강암 이외에 특이하게도 주변에서 산출한 점판암을 사용하였다.

 

문터는 본성에 동서남북 4곳이 있고, 내성 2곳, 외성 1곳 등 모두 7곳이 있다. 4대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통로로 사용되었던 것은 서문인데, 서문과 동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서문 남쪽에는 성벽을 3m 정도 터내서 만든 대형 수구(水口)가 있다. 건물터는  모두 16곳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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