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스님 마음 중에서 "마음의 눈을 뜨고" 제1편
불교의 참 모습에 대한 안목을 차차 열어 주면 아무리 유물주의자고, 아무리 히피족이라도 불교에 대한 취미를 붙이게 됩니다. 불교에 대한 취미는 곧 자기에 대한 취미로 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我라고 하는 이 인생은 밥만 먹고 똥이나 싸고, 늙고 병들고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존재인 줄 알았더니, 참 나, 진아眞我는 그것이 아니구나! 나의 참 면목은 마음이로구나!’ 이렇게 깨우쳐집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닌 게 마음이라고 하면 어떻게 늙어 죽을 수가 있고, 불에 탈 수가 있겠습니까? 이 몸뚱이나 현상계는 모두 다 자기 꿈인테, 그 꿈 속에서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겠습니까?
쇠망치로 두들겨도 부서질 것도 없고, 불에 넣어도 탈게 없습니다. 그런 것이 생명이고 이야기할 줄 알고, 오고가고 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생각할 줄 아는 이 주인공은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이 마음은 지식이나 사상이나 생각도 아닙니다.
이런 줄을 알고 나면, ‘아! 이런 굉장한 내가 있는 줄을 모르고 육체를 내라고 고집하여 헤매였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육체 생활, 이것는 팔고(八苦=여덟 가지 괴로움)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육체 생활, 이것은 고통의 생활이고, 자꾸자꾸 죽어 들어가는 생활입니다.
가령 백년의 명命을 타고 나온 사람이 1년을 살았다면 살 날이 99년 밖에 남지 않은 것이고, 두 해를 살았다면 2년을 죽음 앞으로 다가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커 간다든지 살아간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말이 됩니다. 이와 같이 인생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죽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농사짓고 장사도 하고 별 짓을 다 하지만, 결국은 백년 목숨을 타가지고 나와서 첫날부터 하루씩 하루씩 죽어 들어가는 것 밖에 안됩니다. 삶이 무엇인지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 그것도 모르고, 현실에 시달려 생로병사(生老病死=나고 늙고 병들어 죽음)를 할 뿐입니다.
병이 들면 괴롭고, 병을 나으려면 치료를 해야 하고, 그러니 벌어야 하겠고,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복잡한 고통이 끝없이 따라옵니다. 세계의 약을 모두 다 구해놓고 세계 의사들을 다 동원시켜 옆에 앉혀 놓았댔자 자기 자신은 앓을 만큼 다 앓아야 하고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 합니다. 아무런 회계가 안닿는 게 소위 우리 육신 인간의 한 평생입니다.
세계 돈을 다 모아 봐도 나한테 소득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외려 돈 많은 사람은 돈 없는 사람보다 이 약 저 약 쓰느라고 고생만 하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백년을 더 사는 것도 아니고, 몸이 더 건강한 것도 아닙니다. 돈이 많으면 공연히 더 헤매게만 되고, 무엇을 할까 하고 망상과 번민만 더 피우게 되고, 밤에 잠도 못자고 음식도 제 때를 못찾아 먹게 되어, 육체나 마음이 모두 지치고 시들어 나중에는 불안해지고 맙니다.
권리가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적들이 많아지고, 적이 많아지면 결국 자기는 고독한 신세가 됩니다. 돈이 많고 권리가 높으면 적이 많아져서 더욱 더 고독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다운 행복은 육체나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 속아 사는 생활입니다. 마음을 깨치지 못해서 현실을 잘못 보고 미래를 잘못 진단해서 속이 어두운 현잡배에게 자기의 진귀한 보배를 사기당한 생활입니다.
우리가 오직 구해야 될 것이 있다면 마음의 밝은 원리를 깨쳐야 하는 일이며, 육체와 현실은 다 꿈이요, 착각이고, 마음의 그림자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의 오관五官 작용만 해도 그렇습니다. 가령 천지를 진동하는 대포소리가 울리더라도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심각한 고민이 있거나 어떤 일에 열중하여 삼매三昧에 들어가 있을 때입니다.
종소리의 경우만 해도 일본 사람은 ‘강강강강’ 난다고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땡땡땡땡’이라 그럽니다. 우리가 땡땡땡땡 하면 일본 사람은 웃습니다. 또 일본 사람은 큰 종소리를 ‘공공’이라고 하고, 우리는 ‘꽝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큰 종소리가 공공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이고 우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은 꼭 공공으로만 들립니다. 그러므로 종소리는 공공도 아니고 땡땡도 아닙니다. 종소리의 실상음實相音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대답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강강이나 땡땡이 귀에 젖어있기 때문에, 강강과 땡땡을 빼고 종소리를 들어 보려고 하면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각국마다 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참되고 순수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고 자기 기분대로 듣고 조작과 습관으로 듣게 됩니다. 종소리를 바로 듣는 것은 갓난애기가 처음 귀가 트여서 강강인지 공공인지 모르고 듣는 그때입니다. 또 도인은 제대로 듣습니다.
도인은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이것은 청각작용聽覺作用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눈으로 무엇을 보고 크다 작다 하는 시각작용視覺作用도 한 가지입니다. 크다 작다 하는 절대 기준을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가령 손바닥 만 한 거울을 가지고 춘천 뒷산에 올라가서 비쳐 보면 춘천이 그 거울 안에 다 들어 옵니다. 손바닥만 한 거울 안에 꼭 춘천하고 똑 같은 질량이 나타납니다.
실제로 십리 밖에 있는 것은 거울 안에 십리로 보이고, 오리 거리에 있는 실물은 거울 안에서도 오리로 보이지만, 이것이 거울 밖으로 십리나 오리를 뚫고 나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거울안에 춘천만 한 그림이 나타나지만 춘천만 한 면적에 그림을 그려야만 할 것 아닙니까? 손바닥 만 한 곳을 춘천을 그리려면 큰 빌딩이 깨알만하게 나타나야 할 것인데 그대로 나타나 보이니 하나의 착각 아닙니까?
우리 눈에는 확실히 거울 속의 천연색 그대로 입체적으로 나타나 보이고 또 십리 밖에 있는 것은 십리 밖의 것으로 백리 밖의 것은 백리가 되어 보입니다. 또 손바닥만 한 거울에는 그렇게 된다 하고 손바닥 반 만 한 거울에도 역시 춘천이 꼭 같이 다 나타나고, 나중에는 손톱만 한 거울에도 춘천 만 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착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큰 것을 크다고 본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크다고 보는 결과가 됨을 말합니다. 화가가 아무리 묘사를 잘 한다고 해도 이렇게 그리기가 힘들 것입니다. 확실히 말하자면 마음이 거울에 직접 나타난 것입니다.
이 마음의 거울은 작다고 하면 바늘끝 보다도 작고, 크다고 하면 우주에 가득할 것이니, 크다 작다 하는 말은 어디에다가 기준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기분에 따라서 작은 것이 대단히 크게 보일 때도 있고, 큰 것이 아주 작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와같이 맛味도 기분에 따라서 설탕이 쓰고, 소태가 달 때도 있습니다. 또 추운 날이 더웁게도, 더운 날이 춥게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 우리의 오관이 정확하지 못하다는 것을 뜻하며, 우리의 오관작용이 심한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마음에서 부처가 나오고 하느님이 나오고, 우주가 생겨 나오고, 꿈속 세계도 나옵니다.우리는 밤 꿈에만 우주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꿈을 깬 낮 꿈에도 우주를 창조해 냅니다.
그러므로 꿈이라고 하면 낮 꿈 밤 꿈이 다 꿈입니다. 밤, 낮, 금생, 내생이 다 꿈인데 이 꿈가운데 꿈이 아닌 것은 꿈을 꾸고 우주를 창조해 내는 우리 마음 뿐입니다. 밤 꿈에도 이 마음 이대로이고 낮 꿈에도 이 마음 이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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