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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스님 불교佛敎가 현세現世에서 갖는 의미意味 "마음"

현재가 중요해 2023. 7. 3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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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스님 불교佛敎가 현세現世에서 갖는 의미意味 "마음"

불교佛敎가 현세現世에서 갖는 의미意味.

효봉이 모든 것을 군더더기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속에서 말로 표현된 모든 것이 군더더기란 뜻 보다는 그분의 생애에서 모든 것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법기암法起庵 토굴에서의 결사적인 정진 끝에 오도悟道한 이후로 그분은 한국불교의 통합과 불교의 전파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그리하여 그분은 63411일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개인의 길에서 종정이라든가 전파는 거치장스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길에서는 언제나 정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함께 세상을 태어났다는 인연때문에 사해대중四海大衆들을 깨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아니다. 이렇게 말 할 것이 아니다. 차라리 불교는 사해대중의 구제에 더 큰 뜻이 있을지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득도를 한 다음 우베라촌에서 내려왔고 의상 또한 고국 신라로 돌아왔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그들이 왜 내려왔고’ ‘돌아왔는가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누구에게로 돌아왔는가? 그의 나라로, 그의 형제들의 곁으로 온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떤 사실 앞에도 우선하는 일이다.

 

우리들은 한국인이다. 많은 한국인의 구제가 오늘의 한국 불교의 명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기 애국론愛國論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애국자를 배출한다거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아니며 또 대중들을 천당으로 인도하는데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죄악과 번뇌와 고통속에 잠긴 인간을 참 인간이게 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죄악과 번뇌를 버리고 진정한 안락을 누리게 하도록 하는 것, 지혜롭게 하는 것, 자비로운 협조자이게 하는 것, 그것이 불교의 참 뜻인 것이다.

 

그것을 원효는 오직 자리와 타리를 염원하고 보리, 즉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는 인간의 모든 지식이 필요하다. 아니 오히려 고오다 부다가 그러했 듯이 그러한 모든 지식은 궁극적인 이해의 진리와 체현體現에 필수불가결의 기초지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불교의 대명제 앞에서 한국불교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매일의 신문들이 활자화 하고 있듯이 내분’ ‘탈퇴’ ‘불만’ ‘파문’ ‘반대’ ‘타락의 일변도가 아닌가?

 

이러한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는 책임이 다른 파에 있고 나에게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이유가 있다면 그들에게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임은 양자에게 다같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따진다거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불교가 대중을 구제하고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싶을 뿐이다. 이것이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나의 유신 재건론이라는 것이 되겠지만 나는 굳이 유신이라는 말로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그 말은 너무나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의 유신론唯信論

 

내가 내세운 세 가지 큰 항목 중의 하나인 불경佛經 한글 번역은 나의 주장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용성대사龍城大師의 큰 뜻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경 번역사업은 일찍이 대사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불경은 승려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차라리 더 많은 대중들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은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한글 세대들이 계속 자라나고 있기 때문에 불경번역은 한국불교의 가장 시급한 최대 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경 번역사업과 더불어 또 다시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은 불교의 대중화 내지 불교의 현실화 운동이다. 사람들이 한가로운 때, 신심信心이 두터운 때에는 사찰이 산간에 있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이 분주하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믿음이라는 것을 가지기에 어려운 시대에서는 신자와 승려들의 대화와 이해소통으로 그 갭을 메꾸어야 한다.

 

사람들은 시달리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먹고 출근하고 많은 일과 사교에 시달리고 그리고 저녁이면 솜같이 지쳐서 집으로 돌아간다. 밥을 먹고 잠에 떨어진다. 다음 날도 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 그들에게 사찰을 찾을 만한 시간이 없는 것이다. 불교가 그들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그러면 한국불교는 어떻게 대중들을 찾아가야 한단 말인가?’라는 다음 문제가 따라온다.

 

어떻게 대중들을 찾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승려들의 교육문제와 연관된다. 이제는 극락이라든가 기이한 선문답禪問答으로서 대중들을 거느릴 수 없다. 그러기에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너무나 영악하다. 그들은 환상이라든가 가상적 세계의 약속을 뿌리칠 수 있도록 충분히 영리하다. 그러기 때문에 승려들은 그들과 정식으로 만나는 수밖에 없다. 정연한 논리로서 보리의 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나로서 이 세가지 문제는 파벌이라든가 이해타산을 넘어서서 공감할 수 있고 공감으로써 실현시킬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었다. 그랬는데 어떻게 그런 결과가 빚어질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제의한 모든 안건은 깡그리 부결되고 말았었고 그리하여 나는 며칠을 번민한 끝에 탈퇴성명을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각계의 지인들은 거기서 나의 경솔성을 지적하고 돌이켜 생각하라고 권유했었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런 식으로 한국불교의 내일을 바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와서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그 탈퇴가 오히려 한국불교를 제자리로 옮겨놓은 첩경이되고 말았지만, 탈퇴라는 너무도 소란스러운 사건으로까지 치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때의 나의 심경엔 많은 앙금을 남기고 말았다. 그 앙금은 지금도 조용한 시간이면 나를 찾아온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고즈넉한 밤에 문을 열고 나가 나무숲 사이로, 냇물가로 거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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