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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스님 마음 중에 "올바른 생사관生死觀"

현재가 중요해 2023. 9. 11.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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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스님 마음 중에 "올바른 생사관生死觀"

올바른 생사관生死觀. 인간의 애착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생에 대한 애착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이 살기 위한 행동이며 또한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며 노동을 하는 것이 모두 먹고 입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부모의 몸에서 떨어져 나올 때부터 삶을 영위하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생에 대한 애착은 욕망과 함께 생기는 것이므로 이왕 생을 누릴 바에는 더욱 잘 살고 보다 오랫동안 살기를 기도하게 된다. 남보다 잘 살려는 애착과 욕망 때문에 인간 사회는 서로 반목과 질시를 따르게 되고 타락과 패륜이 계속된다.

 

물론 잘 살려는 욕망이 선의의 경쟁으로 나타날 때는 사회의 질서와 도덕이 확립되는 가운데 사회의 발전이 있을 것이나 오늘날의 인간 사회는 그와는 반대로 남이야 어찌 되었던지 자기 혼자만의 영락과 안일을 위하면 그만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상이 횡행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오래 살고 보다 잘 살고 싶어도 인연이 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를 살았다고 하면 하루만큼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또한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생각하면 인간은 한 조각의 구름처럼 생기었다가 홀연히 없어지는 존재다.

 

그래서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생야일부운기사야生也一浮雲起死也 일편부운멸一片浮雲滅이라고 하였다이러한 인생을 무엇 때문에 살려고들 할까?

 

내가 몇 년 전 속리산 법주사에 있을 때의 일이다. 법주사에 신사 3, 4인이 올라왔기에 그들을 불러놓고 인간이 무엇 때문에 사는 겁니까?하고 물었더니 그중 한 사람이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죽지 못해서 살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나도 죽지 못해서 사는 인간에게는 할 말이 없다면서 그들과 함께 호탕하게 웃어본 적이 있다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서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연(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然)에 이르게 되면 삶이나 죽음이 문제 될 것이 없다.

 

즉 구름 자체가 없을진대 생사生死 역시 있을 리가 없다. 인간의 육체는 사대四大가 화합한 가성假成으로 여기에 피가 제대로 순환하면 살았다고 하고 순환이 중지되면 죽었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생명이 없는 기계와 같은 것이다. 전자기계니 우주 기계니 하는 것들이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갖췄지만 기름이나 전기를 통하지 않으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육체는 흘러가는 한강 물처럼 날마다 변한다. 평생을 사는 부부라 할지라도 사실은 매일 딴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제의 남편은 벌써 오늘은 어딘가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즉 육체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한강 물이 고정으로 존재해 있지 않음과 같다.

 

만일 한강 물을 어떤 그릇에 담았다면 그릇에 담긴 물은 한강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한강 물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한강 물이란 고정적으로 존재해 있지 않다. 그래서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인 것이다.

 

요새 젊은 세대에서 흔히 말하는 자아상실이니 자기부재이니하는 것이 이런 의미에서 사용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날 서구에서 유행하고 있는 성 개방 운동이나 히피족의 부정적 행위도 이런 사상에서 유출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하여튼 이러한 사조는 인간이 무상함을 절실하게 느낀 나머지 초래된 현상들이다. 그렇기에 이 유한적이고 무상한 인생을 마음껏 향락하자는 심산이 아닐까. 물론 인간의 삶이 이렇게 간단하게 정의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무엇 때문에 사느냐 하는 문제를 따지게 되면 실로 대답이 궁해진다. 법주사에 찾아왔던 신사들의 말대로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일까. 생각하면 그들의 말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우리는 그보다 현명한 대답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올바른 생사란 어떤 것이냐. 이것 역시 지극히 어려운 문제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생사는 부운이 기하고 멸하는 것같으나 사실은 그 부운자체가 없듯이 생사 또한 그 본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독유일물상독로獨有一物常獨露하니 담연불수어생사湛然不隨於生死라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일물一物이란 또 무엇일까. 이것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사상이다. 여기에는 집착하는 애욕적愛欲的인 사람이 아니라 일체를 초연하는 긍정적인 태도와 이타적인 자비의 사상이 포용된 참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바르게 살고 죽는 것, 즉 올바른 생사관이란 일체와 섞임이 없이 청정한 경지에서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불멸하는 삶을 구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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